노라 (The NORA)
2017.11.01 - 11.19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지만 한정된 재화 속에서 바라는 만큼의 욕구를 채울 수 없다. 끝 없이 늘어만 가는 기대는 욕심으로 변질되고, 그 속에서 소유를 둘러싼 강자와 약자의 계급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기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비관하고 원망한다. 개인의 고통은 타인에게 또, 나아가 사회 전체로 전이 되고 왜곡된 사회구조가 고착된다.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깨달으며 자아의 각성을 이룬다. 노라가 살고 있던 시대의 가정 윤리는 그녀를 억압하는 사회 구조로 작용 하고 있었다. 반면 오늘날 고통스러운 구조는 경제성과 효율성을 잣대로 삼아 공고화 되고 있다. 이 쓸모의 기준을 채우지 못한 이들은 철저하게 소외 받고 배제 된다.  

 오늘도 우리는 이 시대에 굳건히 자리 잡은 고통의 구조 속에서 견디며 살아간다. 노라 처럼 자아의 각성을 이루는 것도, 인형의 집을 뛰쳐 나오는 것도 쉽지 않다. 단지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고, 다시 욕심부리고, 또 고통 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그 속에서 타인에게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대고 더 좁은 인형의 집으로 서로를 내몰아간다. 오늘날 인형의 집의 벽은 더욱 두터워져 간다.











[플롯, 공동 삶에 균열을 내는 노림수]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마치 한편의 기승전결 구도를 지닌 드라마와도 같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하지만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틀에 대해 다루는 자세. 작가는 ‘공동 삶’이라 여기는 것들이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의 작동기제를 가지고 움직이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이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역사를 전공한 이력에서 비춰볼 수 있듯이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인문학적이고 분석적인 사유의 틀 속에서 끊임없이 비교하고 탐구하는 대상이 된다. 그 자신 역시도 이에 밀착해서 때로는 제삼자처럼 무관하게 거리를 띄우기도 하면서, 객관적으로 발견하고 수집한 재료들을 가지고 이번 개인전을 준비해왔다.

 사회적 환경과 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예술과 그 방법론은 그저 르포의 시선단계에 멈추길 거부한다. 가시성과 담론성의 형태는, 그가 생각하는 문제적 지점들을 표출하는 데 있어서,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감응으로 출발하여 그것이 냉철함으로 첨예화되는 사유의 단계들에 관여하고 있다. 어떤 재앙을 반영하는 형태이든지 예술의 외관이란 장면을 드러내거나 ‘변형’시키는 것에 복무하고 그것이 또한 거울이 되어 ‘잔상’으로 맺혀지고 스며들며 침투하는 과정 속에서 경험을 제공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인데, 특히나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의 주된 과제 중 하나는 예술로서의 ‘가시성’을 다양하게 실험해보는 것이었다. 또한 그 안에 담론성의 구조를 보다 유기적으로 설계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작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설계한 각 작품들이 함의하는 일종의 ‘상황적인 지시_서사’를 통해 전시를 이루는 모든 작품들은 유기적으로 얽혀진다. 이러한 방식은 내가 그의 작업을 바라보고 특징짓는 중요한 해석지점들이다.

 음악, 공연 등 그가 예술프로젝트로 참여했던 분야들은 영상, 멜로디, 리듬, 연출 등이 중요한 작업이었다. 여기서 그가 작품으로서 구현하는 방식을 보자면, 흐름상의 스토리와 관람객이 호흡하는 환경 등이 명확하다. 이 측면에서 나는 인터뷰를 나누는 와중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의 특성과 기질 그리고 주요 관심사 등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아야 했다. 그 와중에 발견한,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찾고자 하는 절실한 지점 중 하나는, 전시와 시각예술의 구현방식이라는 형식적 측면과 시각예술 안에서 ‘담론’의 의미를 사색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담론의 ‘역할’과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다. 분명 그것은 그의 장점이지만, 그 스스로 단점이라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서사성’에 좀더 주목하는 것이다. 때로는 무대설치처럼 때로는 상영의 형식으로서 일정한 플롯들을 녹여내는 방식, 물론 이번 전시에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개개의 작품에 대한 주목과는 별개로, 그 흐름을 쫓을 필요가 있다.

“자, 말씀 드리지요. 당신은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 역시 당신을 모르고 지내왔지요. 여태까지는... 제말 저의 말을 중단시키지 마세요. 끝까지 들어보세요(...)”
.....
“그런 일은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소.”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인 노라의 상황들, 위의 극 속의 대화는 공동 삶들 속에서 당연히 여겨왔던 역할에 대해 주인공인 노라가 ‘각성’하는 장면을 암시하고 있다. 왠지 불편한 상황들이나 거부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때야말로 자기 현재와 상황적 존재로서의 스스로를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경계에서 고민할 수 있도록 장치하는 유일무이한 계기일 지도 모른다. 각성은 ‘불편함’과 ‘거부’를 작동원리로 삼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판단을 보류한 ‘공동 삶’ 안에 주조되어 있는 은폐되고 잘못된 구조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시를 이루는 각각의 작품들은 그의 노림수에 의해 다시금 잘 직조되어 있다.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그가 내뱉듯 던져놓은 상황들에 대한 ‘각성의 기제들’이 관람자의 태도에 -과연 관람자는 주제에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탐구로서 일정한 흐름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적’이라고 읽히는 이유이다.

 전시에 소개되는 한편 한편의 애니메이션은 공동 삶의 상황들에 대한 형태를 보여준다. 이 모든 장면들은 도구화되고 인간성이 상실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인간이 직면한 상황들에 대한 객관적인 상황이자 차가운 작업이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개인의 철학보다 자식을 위해 해줘야 하는, 외부의 시선이 스스로에게 욕망화 된,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역할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유모차에 실리는 물건들에 파묻혀 정작 자신과 아이는 없을 지도 모른다. 또한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폐타이어 같이 전성기에서 밀려난 탄력성을 잃었다고 여겨지는, 노인들의 일상이 한 켠에 펼쳐진다. 노인의 일상은 관성적으로 TV를 보는 것 외에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없다는 아주 우울한 장면이다. 버려져도 상관없을 고장난 부품처럼 그들이 이룩한 과거는 그들 삶에 영광과 주체로서의 자긍심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모두가 주류사회의 안녕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 삶’에 종속되어 있다. 여기서 ‘공동 삶’은 국가와 민족과 세대의 가치를 오히려 각 존재들에게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그저 수용해야만 하는 수동적인 일상의 굴레일 뿐이다. 작가는 ‘공동 삶’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익숙하지만 왠지 불편하기 그지없는 구체적인 일상의 장면들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장면들이 펼쳐지는 외관의 상징으로 인형의 집과 수조를 고안한다. 이것은 일종의 ‘각성’의 기제에 대한 몰입된, 상징적 모티브가 된다. 역할극을 설정으로 하는, 아주 작은 플라스틱 인형집이다. 문득 방임적 자유와 관념적 이상의 추구는 초인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는 듯이 공동 삶은 이를 가두어 두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결국은 부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나약하고 작은 구조물 속에서 균열의 지점들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유리 수조, 이 투명성은 마치 모두 들여다보이지만 암묵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공동 삶이 주조해낸 전략과도 같다. 투명한 수조를 통해 그 안에 갇힌 생명은 그 수조 바깥으로 나오면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일상에서 안고 산다. 인형의 집과 수조,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지레 포기하는 ‘비관’과 균열이라는 파괴 그리고 동시에 창조의 가능성을 갖는 ‘낙관’이라는 혼용된 감정 속에서 우리의 신체는 이 혼란이 주는 감정에서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자극을 이 작업들을 통해서 반응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이렇게 사회적 구조 ‘공동 삶’의 현실에 대한 상황들을 묘사했다. 그 상황을 진단하는 생각의 단계들은 그의 작업노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채워지지 않고 늘어만 가는 기대는 욕심으로(...) 기대 충족에서 오는 행복을 넘어 허상을(...) 충돌하는 욕망은 타인의 가장 기본적인 기대마저 착취하기에 이른다”
공동 삶에 대한 구조적 비판은 이에 당면한 개개인의 윤리구조, 욕망구조의 편협함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 편협함은 다시 “개인의 고통은 타인에게 또, 나아가(...) 변질된 욕심이 왜곡시킨 사회구조는 점점 고착화(...)”되는 공동 삶의 작동구조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타인의 욕심이 나의 삶을 과중시키고 또한 구조적 판단에 따른 나의 삶은 또 다른 타인의 삶을 과중시킨다. 이 비극의 순환고리는 일종의 인과적 굴레로 다시금 인형의 집과 수조 속에서 그리고 현실의 장면들 속에서 어떻게 내재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욕망들, 그 구조가 직조되어 어쩌면 ‘공동 삶’은 극복할 수 없는 덫이자, 주류사회의 고도의 기획이 실현되는 장이다.

 이 비극적인 구조들의 장이 이번 전시가 갖는 서사의 첫 번째 장면들이다. 두 번째 장면은 캔버스 작업에서 돌출된다. 각 캔버스는 구조적 한계성의 구체적인 허상들을 직접적으로 텍스트화하고 있다. 전형적인 글씨체와 입체로 표현된 작업은 작은 덩어리들이 덕지덕지 붙어 만들어진 실체없는 허상들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욕망구조의 편협함으로부터 발생한 자기합리화의 내용들, 문구 하나하나 속에서 곳곳에서 지속되어 왔던 편견과 차별, 구조를 용인하는 당위성, 다름에 대한 주류사회의 태도가 그 안에 직접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어찌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의 출발점은 이 작업을 통해서 농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식별과 평가의 규칙과 기준들로 특화되어, 또한 정신의 한 자락에 공고히 위치해 있던 내적 규범성이 고발당하고 풀어헤쳐지는 순간이다. 특히나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지경으로 겹쳐진 풍경과도 같은 이 캔버스들은 각각이 알려진 것, 실행되지 않는 것, 실행될 수 없는 것, 의도되지 않은 것, 의도된 것 등의 모든 속성들을 펼쳐놓은 공동 삶의 덫인 ‘인형의 집’이 함의하고 있는 그 폭력성을 선언한 작업인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플롯은 공동 삶의 상황에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배제되어 버린 수많은 기대와 다양성, 주체와 인간적임에 대한 술어들을 에둘러 모으는 방식이다. 술어는 기술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무대장치처럼 작가는 온 감성으로 이에 대해 추모하고 애도하는 작업을 연계함으로써 이번 작업들을 마무리 한다. 단단한 직조들이 모두 하나의 실오라기로 풀어헤친 듯한 한지 설치작업에는 깜박이는 빛이 마치 버려진 것들에 대해 애도하고 공동 삶에 묻혀진 희생들을 어루만지는 일종의 깨우침의 장치이자 살아있음을 존재로 증명하는 상징으로 자리한다.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내는 힘들에 대한 지지로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포착하여 외화하고, 자기 안에서 빼낸 진리들을 객관화하여 다시금 파악하는, 모든 경쟁으로부터 해방시킨 사유. 그것의 가능태는 어떻게 일구어낼 수 있을까. 문득 작가와의 인터뷰 후에 곱씹고 또한 곱씹었던 고민들이다. 알고는 있지만 개념을 만들지 않았던 무수한 장면들에 대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명명한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 자격.
송주형의 작업은 표현적이지 않다. 그의 작업은 상황을 탐구하고 분석하고 맥락을 연구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적합하다. 나는 오히려 그가 이에 더 몰입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우리가 공동 삶이라는 실체 속에 종속되어 존재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면, 그 밖을 예측하고 내다보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인형의 집에서 한갓 역할놀이를 부여받아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인형이 현실세계의 우리의 한계적 면모라면 특히나. 그렇기에 그 안에서 첨예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논리와 발굴한 것들에 대한 의견이 정당할 수 있음을 쫓아야 한다. 모두의 욕망 구조가 순환적일 뿐 아니라, 어느 시대고 공동 삶에 대한 구조는 존재해왔음을. 그것을 차갑게 비교하고 분석하는, 바로 역사 속의 장면들이 동시대적으로 중첩되는 장면이기에, 따라서 나는 그의 작업이 지금의 현실세태의 테두리라는 측면에 갇히지 않길 바란다. 그의 작업은 그가 발견한(발굴한) 조각-서사들을 나열한다. 그 위치와 상황에 배열함으로써 조각-서사들의 덩어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한편의 서사를 마치 퍼즐 맞추듯 꿰어가는 작업. 분명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실재하는 것을 드러내거나 혹은 상징으로서 약호화 하는 것 사이에서 경계를 지정하고 있는 작업은 아니다. 바로 그 불분명한 경계가 주는 혼란의 틈 사이로, 그의 플롯이 또 다른 서사들로 미끄러져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과 내일의 기대를 남기며, 언젠가 작가가 다음과 같이 부름에 첫 구절을 떼길 바란다.“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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