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번도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다


<죽음공동선언>
2020.12-2021.01 스페이스 나인(서울)





현대의 도시는 거주지의 의미를 넘어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유기적인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도시에서만 살아왔고 나에게 주어진 도시의 환경은 선택보다는 천부적인 것이었으며 관습적인 방식으로 삶에 적용됐다. 오랜 기간 도시 속에서 살아오면서 체득하고 익숙해진 양식들은 관성의 논리로 작동하며 개인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개인을 둘러싼 사회 환경적 요인은 삶의 조건들을 우선적으로 종속시키고 그 속에서 삶은 많은 방향으로 분화해간다. 일부 케이스를 제외하고 대부분 현실의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 삶은 개인의 노력과 성취와는 별개로 일어나는 주변 환경의 관성에 끌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효율성의 가치에 중심을 둔 현시대의 도시는 소유에 대한 욕망과 물(物)의 끝없는 추구, 발전과 능률 중심의 사고는 물질적 가치에 권위를 부여해 차별적 계급 질서를 고착시켜 왜곡된 사회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라는 외부적 요인에서 비롯된 질곡이 개인의 삶의 궤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나는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서 이러한 왜곡된 현실 속에서 자신을 비워내고 정신적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삼아 살아가려 한다.

정신적 자유로움은 현대사회의 과잉된 물질화가 가져오는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세의 세속적 물성을 해체하고 다시 덮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2차원적 평면위에 물질을 중첩시키는 반복 행위 과정에서 일상과 현실의 세속적 순간들이 사라지고 변이되며, 무화되고 다시 생성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물질이 본래 가지고 있던 환영을 제거하면서 물질로 물질을 지워낸 초월적 정신적 공간으로의 전이를 유도한다.

시멘트, 퍼티, 석고보드, 합판 등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재료의 해체를 통해 근대적 성취와 열망, 물질 숭배로 귀결된 실패한 발전의 판타지를 허문다. 그 위에 피어난 자연적 형상은 무규정적이면서 개방적이고, 생명의 발생과 소멸처럼 순환하며 목적 없이 일정한 객관성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개화시키는 절대적 의미의 자연이 내포한 객관적 질서와 조화의 추구를 의미한다. 무화된 물질 위에 시공간이 다른 자연적 이상향의 풍경을 중첩시켜 만들어낸 모순적 인터스페이스는 그 속에 머물며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고 잠시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함이며, 도시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삶에서 오늘을 견뎌내고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다.



  

합리성 앞에 분열하는 초자아
- 평론 : 배민영

도시는 누가 뭐래도 합리성을 표방하는 공간이다. 적어도 이분법적으로 볼 때 자연에 가까운 시골에 대항하는 문명의 공간은 소수의 계획과 다수의 추종으로 건설된 운명의 제국을 ‘합리’라는 이름으로 끼워 넣는다. 역사는 항상 도시의 비중을 늘리는 방향에 골몰했고 그 과정에서 문명의 충돌과 화력 경쟁은 도시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것은 문명의 죽음을 예고하기도 했지만, 정치와 행정은 여기에 인공호흡을 가했다. 20세기 중반 모두의 현대가 어설픈 합의를 선언하자 부동산 가치를 앞세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럭저럭 건재함을 알려왔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를 통해 서구적 합리 준거가 가진 허망함을 폭로했고, 이는 철학계에서 구조주의라는 사유방식을 개척하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자전적 여행기의 한계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좋은 위로가 될까 싶을 정도로 구조주의는 후대의 걸출한 사상가들의 계승과 여러 논고 속에서 공허해지는 역설적 한계에 봉착했다. 그럼에도 그는 “구조(structure)는 체계(système)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말을 남겼다. “체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 전체인 반면 구조는 여러 집합에 공통적 원리이면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특징을 간파 혹은 그렇게 정의했다. 이는 “의식은 자신을 속인다”는 마르크스의 교훈이 레비-스트로스를 지나 무의식의 욕망을 이야기한 프로이트-라캉의 계보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나르시시즘-상상계, 반복강박-상징계, 근원적 억압-현실계라는 3원 구조가 그것이다.

자크 라캉의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고 하는 언어 결정주의는 도시의 삶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갖는다. 그것은 계급을 정당화하며 ‘새로움’의 가치를 표준화한다. 정신적 측면이 물질적 측면에 복속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라캉의 욕망이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상징계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호하는 차원의 꿈인 상상을 넘어 욕망이 주체를 제압하고 죽음충동과 자기비난을 계속 하는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주이상스jouissance 단계에 들어서면서 주체는 병리적 현상의 객체로 죽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살게 된다.

송주형 작가가 <신도시>(2018)에서 “집은 우리 삶의 왜곡된 현실 구조를 상징하는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순환굴레와도 같다.”고 밝혀둔 작업노트를 먼저 소화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일면 사회비판적 성격도 띠지만 한편으로는 욕망에 대한 중립적 통찰을 지향하기도 한다. 상상계를 포기하는 순간 죽음이 찾아온다는 라캉의 이론은 사실 상징계가 없으면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작가의 대상인 집과 도시는 체계가 아닌 구조로서 담아내고 있다. 즉,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을 채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구의 현대적 관점이 압도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였지만 결국은 디스토피아로 전락한 도시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만을 남겨두고 있다. 제도 안에서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는 듯한 작가의 최근 작업 노트를 들추어보게 된다.

<소요유>(2020) 발표 당시 “의식을 배제하고 무위의 행동을 반복하는 수신(修身)의 방법으로 탈속하여 내적 성찰을 이루고, 나아가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마음과 정신의 해방을 얻은 '逍遙遊’의 단계를 지향한다.”는 송작가는 노자老子의 ‘무위이무불위無爲⽽無不爲’를 차용해 “무위를 위한 반복적인 행위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결과가 오히려 일정한 목적에 합치된다.”고 설명한다. 합리성 앞에 분열하는 문화적 초자아는 생업으로 단절되었던 작업을 시작하고 퍼티로 긁어내며 탈아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리고 벗어나지 못한 도시의 삶을 무위와 반복강박으로 끌어안음으로서 ‘사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것’으로 치환하며 도시라는 구조의 무의미성이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갖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