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都市永訣式(도시영결식)>


22.09.21(수)-25(일), 19:30~21:30 , 7호선 부천종합운동장역 1번출구 (구)경인랜드



 

작가노트


(구)경인랜드는 경기도 부천시에 2007년 개장한 위치한 놀이공원이다. 10여년 남짓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추억을 만들던 공간인 (구)경인랜드는 부천시 소유의 해당 부지가 역세권융복합개발에 들어감에 따라 갑작스레 영업정지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구)경인랜드 측과 부천시는 보상과 문제를 두고 송사에 들어갔고, 6~7년 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놀이기구와 해당 부지는 방치돼 폐허처럼 변해 사라질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

물질 숭배와 발전, 효율에 중점을 두고 끊임없이 팽창해온 도시는 가치에 따른 계급질서를 만들어냈다. 생산하고 소비하고, 가치를 부여하고 소멸시키는 과정 속에서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는 더욱 공고화 됐다. 나아가 물질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삶을 영유하던 개인들에게도 쓸모의 기준이 적용된다. 계급적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현대의 경제적 신분제는 경계 밖으로 밀려난 도심 속 이방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활 반경의 확장, 도시적 문화양식의 일상화 등으로 전근대적인 생활양식으로 취급되고 있는 민속 문화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터주신 역시 도시화에 계속해서 밀려나고, 놀이기구에 자리 잡아 (구)경인랜드와 함께 소멸을 앞두고 있는 상상을 한다. 놀이기구 곳곳에 좌정(坐定)한 터주신과 건궁(신체가 없는 가신)을 모시는 신물이 놀이공원을 성스러운 공간이자 개발에 밀린 폐놀이공원이라는 세속적 현실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이러한 성(聖)과 속(俗)의 이중적 구조 속에서 (구)경인랜드는 위험한 외부와 안전한 내부라는 위계관계가 뒤집힌 모순적인 공간으로 구현된다. 이 물리적 경계는 인간적 가치보다 물질 추구로 전도된 현대 도시의 상징적 경계로 나타난다.

‘역세권융복합개발’이라는 경제 논리에 밀려나 철거만을 남겨둔 채 방치된 폐놀이공원의 오늘은 효율에 밀려나 유예된 삶을 살고 있는 도심 속 이방인의 모습과 닮아있다. 신주를 상징하는 거꾸로 뒤집힌 사당나무와 위령의 폐백인 지전이 놀이기구를 감싼 영롱한 빛 속에서 도시 삶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위한 영결식과 위령제가 열린다.





Ferris Wheel


도시가 만들어지고 팽창하다가 소멸을 반복한다. 끝없는 개발논리와 함께 구도심은 신도시로, 기존의 신도시는 구도심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 또 다시 신도시로의 개발을 기다린다. 이러한 물(物) 중심의 순환은 가치로 계급을 만들어내는 현대 도시의 구조를 더욱 거대하고 육중하게 자리 잡게 했다. 멈춰버린  Ferris Wheel에 인간사의 바쁜 움직임이 투영되고, 그 위로 둥글게 순환하고 있는 초월적 존재의 이미지가 얹힌다.




빙빙


지전(紙錢)은 망자와 함께 보내는 노잣돈의 역할로 쓰였다. 제의(祭儀)에서 공물로 사용되기도 하고 신의 현신(現身) 으로 쓰이기도 하는 지전은 터주신이 좌정하고 있는 성스러운 공간이자 영결과 위령을 위한 만장기(輓章旗)의 역할을 하도록 설치됐다. 지전의 재료로 반투명한 천을 사용했는데 성스러운 공간이자 폐놀이공원이라는 세속의 경계가 공존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Dancing Car


(구)경인랜드의 신주인 사당나무. 현재의 폐놀이공원은 위험한 외부와 안전한 내부라는 위계관계가 뒤집힌 모순적인 공간으로 거꾸로 뒤집혀있는 형태로 자리잡았다.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형태의 사당나무는 계속해서 밀려나 도심 속에서 임시적 삶을 유예하고 있는 존재와 닮아있다.






사물의 정동(情動, affect): 사물을 위로하는 예술 - 안진국 (미술비평)


우리가 사물에 대한 무언가를 확언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 그 자체가 우리 안에서 자신에 대해 확언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 바뤼흐 스피노자, 「신과 인간과 인간의 행복에 대한 짧은 논문」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인간인가? 인간이 도시의 인프라를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규칙과 규율을 만들었으니 인간이 도시의 주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더 넓게 보자. 이 지구행성의 주인은 누구인가? 인간인가? 그 누구도 선뜻 지구행성의 주인이 인간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도시는 지구에 속한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도시의 주인을 인간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다. 도시의 주인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여기게 된 것은 세계를 둘로 나누는 습관이 몸에 뱄기 때문이다. 우리를 존재자인 생동하는 생명으로, 우리 외의 그것을 활력 없는 물질(사물)로 나누는 습관. 이러한 습관은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말을 빌려 ‘감성의 분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감성의 분할이 “세계를 가르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 분할을 만드는 것이며, 들리지 않는 것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것을 분리해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생명과 물질을 분할하는 ‘감성의 분할’은 물질의 활력(vitality)과 물질적 구성체들의 활기 넘치는 권력을 무시하게 한다.
송주형은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에 대해 사유한다. 폐자재, 쓰레기, 집, 숲, 빛, 자연, 건축재료, 놀이기구, 그리고 인간. 작가의 사유는 자본주의 체제의 ‘물질 숭배’ 비판에 닿아있지만, 그것이 작업으로 등장하는 방식은 사물들의 역량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바로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iality)을 시각화하는 방식이다.『물리학의 탄생』에서 미셸 세르(Michel Serres)가 언급했듯이, 세계는 다양하고 변화하는 물질성들이 충돌하고, 경직되고, 형태화되고, 진화하고, 해체되는 격동적이고 내재적인 장(場)이다. 생명/물질, 인간/비인간, 의지/결정, 유기적/비유기적 등으로 나누는 존재신학적 이분법은 그저 위계를 형성하기 위한 인간중심주의적인 발상일 뿐이다. 작가의 이성적 태도는 자본에 의한 인간 소외를 끌어안고 있지만, 그의 작업은 사물의 정동(affect), 즉 비인격적 정동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인간의 몸 주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순환하는 더 넓은 범위의 비인간 권력들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의 의지, 정동, 생동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그것의 ‘있음(being)’은 그것의 ‘됨(becoming)’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경기도 부천종합운동장 옆에 있는 (구)경인랜드는 폐놀이공원이 ‘됨’으로 그것의 ‘있음’을 드러낸다. 이 폐놀이공원은 이번에 송주형이 ⟪都市永訣式(도시영결식)⟫을 진행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멈춰 선 대관람차 ‘훼리스휠’과 빙글빙글 돌지 못하는 ‘빙빙’, 춤추지 못하는 ‘댄싱카’ 등의 폐놀이기구와 그 주변을 ‘좌정(坐定)한 터주신’과 ‘건궁(신체가 없는 가신)을 모시는 신물’로 변모시켜 ‘영결식’과 ‘위령제’를 연다. 놀이기구를 감싼 위령의 폐백인 지전(紙錢, 돈 모양으로 오린 종이)과 그곳을 투과해 비추는 영롱한 빛, 그리고 거대한 신주(神主)—문어발 같이 생긴 5개의 다리를 가진 댄싱카 놀이기구를 뒤집힌 사당나무처럼 만들어 신주 역할을 부여한다— 등등 제의를 위한 제물은 멈춰선 놀이기구와 그 터전의 영(靈)을 위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곳을 폐허가 아닌, 성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성(聖)과 속(俗)의 이중적 구조 속에서 (구)경인랜드는 위험한 외부와 안전한 내부라는 위계관계가 뒤집힌 모순적인 공간으로 구현된다.”(작업노트) 다시 말해 위험했던 폐놀이공원이 영결식과 위령제로 인해 성스러운 “안전한 내부”가 되고, 잘 정비된 폐놀이공원 밖이 세속적인 “위험한 외부”가 되는 공간의 뒤집힘이 존재한다. 그런데 영결식과 위령제를 떠올려 보자. 생명도 아닌 사물(놀이기구와 터)에 영(靈)이 있는가? 작가는 왜 사물을 위로하고 이별 의식을 진행하려 하는가?
폐놀이공원인 (구)경인랜드는 2007년 6월 운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여러 금속체와 장식적인 요소, 작동 시스템들이 결합‘된’ 놀이기구들이 ‘있음’으로써 놀이공원이 ‘됨/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15년 10월 놀이공원 운영을 중단하면서 차츰 폐놀이공원이 ‘됨’으로써 폐놀이공원의 ‘있음’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 ‘있음’은 우리의 감정을 움직인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은 단순한 무성의 존재가 아니다. 사물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놀이공원이 우리에게 즐거움과 짜릿함을 전달한다면, 폐놀이공원은 을씨년스러움과 서늘함, 스산함에 빠지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정동이다. ‘정동’은 개인적 차원의 정서나 감정보다 넓은 개념으로, 그 이전의 단계, 즉 전-개인적인(pre-individual) 단계에서 감정과 느낌을 의미한다.
폐놀이공원은 개인적 차원의 정서나 감정 이전에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정서와 감정이 있다. 이 느낌은 ‘사물의 의지’다.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맥락으로 온전히 환원될 수 없는, 인간에게 자신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사물-권력’이다. 사물은 동식물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다. ‘생기적 물질성’은 그 안에서 꿈틀거린다. 송주형은 폐놀이공원에서 생기적 물질성을 느낀 듯하다. 작가가 폐놀이기구를 대상으로 영결식과 위령제를 진행하는데, 이는 폐놀이기구들과 그것들이 모여 있는 폐놀이공원이 발산하는 정동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바로 물질적 생동(生動) 말이다.
물론 작가가 단순히 폐놀이공원이 지닌 생기적 물질성에만 주목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폐놀이공원에서 느끼게 된 정동의 감각과 함께 이성적인 측면, 바로 ‘왜 이런 곳이 있는가?’에 대한 사유가 존재한다. 특히 이성적 측면은 작가가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꾸준히 문제 제기해 온 시각이다.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물질 숭배’, ‘발전과 효율 중심의 개발’, ‘자본 축적을 향한 욕망’ 등에 관련된 비판적 시각이다. 그런데 폐놀이공원에서의 영결식과 위령제는 어떤 의미인가? 영결식과 위령제는 영혼을 가진 존재, 즉 생명을 지닌/지녔던 존재에게 행하는 의식이다. 그렇다면 이 영결식과 위령제는 놀이기구라는 사물과 놀이공원이라는 터(장소)를 생명으로 보고, 잘 위로하여 떠나보내겠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닌가.
여기서 작가가 지닌 감각적 층위와 이성적 층위가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가 불러온 욕망 때문에 폐허로 방치된 놀이공원(이성적 층위)과 폐놀이공원에서 진행하는 영결식과 위령제(감각적 층위). 물론 “전근대적인 생활양식으로 취급되고 있는 민속 문화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터주신 역시 도시화에 계속해서 밀려나고”(작업노트)라는 작가의 언급에서 이 영결식과 위령제에도 자본주의 욕망에 관한 사유(이성적 사고)가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성적 층위와 감각적 층위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죽어 가는 사물(놀이기구와 터)’, ‘곧 사라질 사물’이 작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힘, 바로 사물의 정동이다. 을씨년스러움과 스산함, 죽음에 대한 감정은 성스러움과 교차하여 작가를 영결식과 위령제로 이끈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번 전시를 기획한 듯 보이지만, 결국 이번 전시를 끌어낸 건 폐놀이공원의 생기적 물질성이라 할 수 있다. 영혼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물이 실은 생명을 갖고 있음을, 사물의 깊숙한 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생기 또는 에너지가 있음을 최근 부상하고 있는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은 말하고 있다.

사회구조 비판과 절대적 존재로서 자연
송주형의 작업은 생기적 물질성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그가 작업을 보여주는 방식은 대부분 물질성, 혹은 사물성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첫 개인전 ⟪Wood Menagerie(나무 동물원)⟫은 버려진 폐자재를 소재로, 쓸모와 가치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이 전시에서 “모든 존재는 그 자체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쓸모없어 보이는 폐자재나무도 태초에는 거친 흙 밭에 깊게 뿌리내려 버텨간 존재였다.”라고 말했다(작업노트). 폐자재나무가 그를 끌어당겼고, 그의 사유를 촉발한 것이다. 사물은 절대 완전히 고갈되지 않는 생생한 실체로 존재한다. 폐자재는 무력하고 쓸모없을지라도 새로운 기호가 되어 자신의 활동을 지속한다. 폐자재 나무는 송주형에게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밀려난 인간 군상의 모습과 묘하게 닮았다.”라는 발언을 이끌어 냈다(작업노트).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지닌 생기적 물질성은 작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후 “왜곡된 사회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물”로서 ‘집’과 ‘신도시’를 주제로 작업을 진행했다. 도시를 지배하는 것이 인간으로 보이지만, 사실 어쩌면 사물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현시대의 보편적 주거양식이 된 아파트와 그것을 중심으로 구축된 신도시는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규격화하고, 물성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자본의 가치가 끝도 없이 상승한 아파트가 인간의 마음을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라. 물론 인간의 소유와 자본 증식에 대한 욕망이 아파트와 신도시에 투영된 결과라고 본다면, 이 상황은 인간이 만든 것임이 맞다. 그렇다고 인간이 도시를 지배한다는 건 착각이다. 아파트와 신도시의 상징성이 증가할수록 이것은 더욱 생기 있고, 거대하고, 위협적인 사물이 되어 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현시대의 집을 뼈대로만 세워진 집(<신도시>[2018])으로 구현함으로써 임시적인 삶의 위태로움을 드러냈다.
역사를 전공했던 작가의 기저에는 소유 욕망, 자본에 따른 계급화, 가치의 기준 변화 등에 대한 비판 의식이 내재해 있고, 그러한 비판적 사유는 사물의 정동에 의해 수면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2019년부터 시작한 시리즈와 2020년부터 선보인 <류(流)> 영상 시리즈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설계를 흩뜨리거나 차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생기적 물질성을 지닌 사물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 풍경이 표현된 반투명한 종이를 중첩하여 한 사람이 앉아서 몰입할 수 있도록 사각의 작은 공간으로 만든 시리즈와, 시공간이 다른 곳에서 채집된 자연 이미지 영상을 중첩하여 만든 <류(流)> 영상 시리즈는 초월적 존재로서 자연이 내재한 생기적 물질성을 오롯이 바라보도록 감상자를 이끈다. 작가는 자연을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인간사회가 형성한 집착과 가치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비워내도록 하여 정신적인 자유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현대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관한 날 선 의식 속에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줬던 작가는 과 <류> 시리즈를 통해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가 하면 2020년 시작한 <소요유(逍遙遊)>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에 접근하는 면모를 보인다. 소요유는 장자의 책 첫 부분인 내편(內篇)의 첫 번째 나오는 편명으로, 그가 추구하는 사상의 핵심이다. ‘소요(逍遙)’는 별다른 목적 없이 어슬렁거린다는 뜻이고, ‘유(遊)’는 이곳저곳을 노닌다는 뜻이다. 결국 ‘소요유’는 “어떤 것에도 구애 되지 않고 마음과 정신의 해방을 통해 얻은 자유로운 정신을 의미한다.”(작업노트) 작가는 ‘소요유’가 노자의 ‘무위이무불위(無爲⽽無不爲)’—무위를 위한 반복적인 행위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결과가 오히려 일정한 목적에 합치된다—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보고, 평면에 물질을 중첩하는 반복 행위를 통해 목적 없는 소멸과 생성이 지닌 자연스러운 목적성을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다시 말해 “비정형의 반복과 무위가 만들어내는 원초적 자연의 형상을 통해 절대적 자연이 내포한 객관적 질서와 조화를 쫓아 현실의 세속적 번뇌를 잠재우고, 탈아의 상태에 도달해 현실을 초극”한다는 것이다.(작업노트) 그런데 <소요유> 작업을 위한 재료는 시멘트, 퍼티, 실리콘, 석고보드, 합판 등 도시문명을 상징하는 건축 재료이다. 자연과 대비되는 인공(도시)적 생동이 이 재료에 내재해 있다. 사물의 정동이 이 작업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생성과 창조성은 인간이 독점할 수 없는 것으로,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관념이다. 사물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관성적이지 않다. 사물은 자신 이외의 사물을 촉발할 힘을 지니고 있다. 사물은 자신을 느끼도록 강요한다.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송주형이 보여주는 작업은 생기적 물질성이 충만하다. 그리고 그것을 이성적 사고가 감싸고 있다. 이 두 층위는 서로를 북돋우며 감각적이면서 이성적인 작업으로 이끈다.
작가의 작업은 도시에서 자연을 향했고, 이제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듯하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도시는 이전의 도시와는 다를 것이다. 송주형이 다시 보여줄 도시의 정동은 무엇일까? 작가가 감지할 도시의 생동은 어떤 걸까? 어떤 사물이 작가를 움직이게 할까? 그가 보여줄 앞으로의 작업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본 프로그램은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부천시, 부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2022 경기예술활동지원사업 <부천예술찾기 미로 美路>’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작가 : 송주형
진행 : 최문혁
설치제작 : 정승환
조명 : 손정은
음악 : Noddy Woo
퍼포먼스 : 이지희(연희그룹 연화), 최유빈(연희그룹 연화)
퍼포먼스 음악 : Jundo
평론 : 안진국